2007년 03월 21일
에스벤베르크 AS - 악당과 히어로와 괴물
“어, 라우냐? 형이다. 잘 지내지? 엥, 여자친구……이번엔 또 뭐야? 앙, 앙. 으아, 워홀리커? 걔네들 탄피를 알약처럼 삼킨다며. 뭐, 크레바스 같은 소리를 한다고? 너 아직도 그놈이랑 친구냐?”
악당과 히어로와 괴물
통합국가 에스벤베르크의 수도 하이베르크. 도합 230개의 ‘거리’가 도로와 통로로 묶여 하나의 도시를 이루고 있는 거대한 마천루.
하운 개틀런트는 그 거대한 도시의 가장 외곽지역인 ‘바람의 거리’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다. 바람의 거리는 하이베르크의 전력공급을 담당하는 곳 중 하나로 언덕에 설치된 수많은 풍력발전 프로펠러 때문에 마치 바람개비의 숲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인간을 좋아하는 바람의 정령들이 힘을 보태기 때문에 바람의 거리의 프로펠러들은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그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 하운의 심기를 심하게 거슬렸다.
“그럼 이 몸께서 강제로 멈춰주겠다 이거야.”
풍력발전 프로펠러에 폭탄을 설치하며 투덜투덜 중얼거리는 하운. 그는 어릴 때부터 완벽이나 절대라는 말을 굉장히 싫어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던지 흠이 있어야만 한다. 삐뚤어진 심성인지 아니면 단순한 열등감인지는 그 스스로도 잘 알 수 없었지만, 그에게 완전무결이란 말만큼이나 끔찍한 말은 세상에 없었다.
“환경오염도 없이 전기를 펑펑 만들어 대다니 농담하지 말라고. 그럼 환경보호단체가 시비 걸 거리가 줄어들잖아.”
터무니없는 혼잣말을 하며 폭탄을 단단하게 프로펠러에 고정한 하운은 반걸음 뒤로 물러서서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덕에 존재하는 프로펠러들의 연쇄폭발을 유도하기 위해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꼼꼼히 설치되어 있는 폭탄들. 하운은 그 광경에 씨익 웃고는 주머니에서 폭탄의 폭파용 리모콘을 꺼내들었다.
“좋아, 이제 이걸 누르면 콰광이다!”
“그럼 일단은 그걸 못 누르게 해야 되겠군요.”
높은 곳에서 들려오는 당당한 목소리에 하운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프로펠러 위에 기괴하게 생긴 도깨비얼굴이 떠올라 있었다. 하운은 손에 들고 있던 리모콘을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구름이 걷혀 환하게 비추는 달빛이 프로펠러 위를 비추었다. 그곳에 도깨비 가면을 쓴 체격 좋은 남성이 앉아있는 것을 확인한 하운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도시의 수호자가 납셨구만. 할 일이 그렇게 없나?”
“악행을 저지하는 것 보다 우선시할 일은 없습니다.”
하나뿐인 형제가 준 하얀 머플러를 휘날리며 단호하게 대답하는 도시의 수호자. 하운은 그의 대답에 크카카하는 소리를 내며 즐겁게 웃었다.
“너 진짜 끝내준다. 완전 정의의 사도구만?”
“그런 소리를 들을 정도의 인물은 아닙니다만…….”
청년의 몸이 가볍게 공중을 날았다. 화려하게 공중제비를 돌다가 부드럽게 바닥에 착지하는 그 모습에 휘파람을 불던 하운은 그가 머플러를 휘날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 얼굴에 떠올라 있던 장난기를 지웠다.
“……제가 제 신념을 위해 싸우는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도깨비 가면 너머로 꿋꿋하고 맑은 눈동자가 하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신념이 자리 잡은 눈동자. 하운은 입매를 부자연스럽게 일그러트렸다. 하운은 어렸을 때 동생에게 주기위해 동화책을 훔쳤던 적이 있었다. 그는 청년을 보며 그 동화책에 등장하던 사악한 마왕을 물리친 정의의 기사를 떠올렸다.
“그거 안 됐구만. 100% 정의의 사도가 아니라면 악당을 물리칠 수 없다구.”
하운은 그렇게 비웃듯이 중얼거리며 천천히 윗옷을 벗어던졌다. 차가운 달빛이 마치 스포트라이트처럼 그를 비추었다. 몸에 착 달라붙는 소재로 만들어진 은빛의 갑옷이 하운의 상반신을 감싸고 있었다. 그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긴 장검을 뽑아 몸 앞에 세우고는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왜 이걸 날려버리려는지 아냐?”
굉천류 특유의 주먹을 앞으로 쭉 뻗은 파이팅 포즈를 취한 채 고개를 내젓는 정의의 사도 청년. 하운은 얼굴 앞에 세워 들고 있던 검을 가볍게 회전시키며 옆으로 뿌렸다. 잘 벼려진 검이 공기를 끊는 섬뜩한 소리가 청년의 살갗을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이걸 날리면 하이베르크의 서른 두 개 거리가 암흑에 빠지지, 그중에 하이베르크 중앙병원이 있는데, 그곳엔 생명 유지 장치에 자신의 목숨을 맡긴 수많은 중환자들이 누워있거든? 딱 5분만 그게 멈춰도 저세상으로 가버릴 사람들이.”
빙글빙글. 날카롭게 날이 서있는 장검을 뒷골목 양아치들이 나이프 돌리듯이 회전시키며 천천히 옆으로 움직이는 하운. 청년은 그의 검과 발걸음을 눈으로 쫓으며 계속 그와 일직선상에 자신의 몸을 위치시켰다. 하운은 싸움에 익숙한 그의 모습에 히죽 웃으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걸 알면서도 이걸 부수겠다는 겁니까.”
“앙. 그 사람들이 다 죽든 말든 아무 상관없어. 난 그저 이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는 프로펠러가 맘에 안 들 뿐이거든. 크카카.”
귀에 거슬리는 소리로 웃으며 검을 늘어트린 하운은 흘러내린 와인색의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게 악당이야. 정의의 사도 양반. 타인을 신경 쓰지 않고 지 좋을 대로만 하는 인간.”
“……이!”
도깨비 가면 너머에서 분노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운은 그 목소리를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를 박차고 청년에게 달려들었다. 하운이 양손으로 쥐고 있는 검이 상당히 기괴한 각도를 그리며 청년의 목을 노렸다. 간발의 차로 검을 피하고 있는 힘껏 주먹을 내뻗는 청년. 하운은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귓가를 스쳐가는 그 주먹에 소름이 끼친다는 얼굴을 한 채 쉬지 않고 맹공을 퍼부었다.
“그리고 그걸 방해받으면 기분이 엄청 나쁘다고! 성격이 더럽거든!”
청년은 대답대신 무시무시한 눈동자로 하운의 가슴에 발차기를 먹였다. 온힘을 다해 차면 바위를 쪼개는 청년의 발차기에 하운의 몸은 그대로 뒤로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하지만 그도 잠시 하운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투로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내저었다.
“어우. 젠장. 무지막지한데. 갑옷이 아니면 죽었겠어.”
갑옷의 가슴부분에 선명하게 찍힌 청년의 발자국을 질렸다는 투로 바라보던 하운은 갑옷을 가볍게 툭툭 두드리며 뻐기듯이 중얼거렸다.
“이건 원래 세계정부군 놈들 물건인데 내가 운 좋게 손에 넣었지. 듣기로는 덤프트럭이 전속력으로 들이받아도 멀쩡하다고 하더라고.”
움푹 들어가 있던 발자국이 어느새 자취를 감추어 갑옷은 처음의 깨끗한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하운은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반대 손으로 고쳐 쥐고 주머니에서 리모컨을 꺼내들었다. 가까스로 평정심을 되찾은 청년의 눈이 다시 한 번 거칠게 요동친다. 하운은 그 눈동자가 마음에 든다는 투로 웃으며, 들고 있는 장검을 까닥여보였다.
“덤벼, 정의의 사도. 싸우지 않으면 악당이 이긴다.”
청년은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하운에게로 돌진했다.
프로펠러를 돌리던 바람의 정령들이 싸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몇 명은 청년의 머플러를, 몇 명은 하운의 긴 머리칼을 휘날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뿐. 하운이 내지르는 바람까지 찢을 것 같은 날카로운 검과 청년이 내지르는 대기를 잡아 찢는 파괴적인 주먹에 바람의 정령들은 넌더리를 내며 둘에게서 멀어져갔다.
휘두르는 주먹과 발차기가 갑옷을 두드린다. 매서운 칼날이 청년의 몸에 상처를 늘려간다. 언뜻 보면 단순한 소모전. 하지만 싸움은 분명 상처를 고스란히 입고 있는 청년에게 더 불리했다. 흐르는 피 때문에 점점 몸이 무겁고 하운이 손에 들고 있는 폭탄의 스위치에 신경이 쓰여 청년의 동작은 시간이 지날수록 파괴력을 잃어갔다.
하운은 이제는 궤적을 눈으로 쫓을 수 있을 정도로 느려진 청년의 주먹을 피해 뒤로 슬쩍 물러났다. 검을 늘어트리고 거리를 벌린 채 비웃듯이 중얼거리는 하운.
“이것 참, 도시의 수호자도 별거 아니네. 룩셈부르크 황제 짝퉁을 아작냈다고 해서 상당히 기대했는데.”
불규칙한 호흡을 고르기 위해 거칠게 들썩이는 청년의 어깨가 굳었다. 하운은 그의 그런 동요를 놓치지 않았다. 금이 가 부서지기 시작한 도깨비 가면 너머로 드러난 앳되어 보이는 얼굴. 자신의 동생 또래쯤 되어 보이는 그 지친 얼굴을 바라보며 하운은 크카카하고 웃으며 손에 들고 있는 리모콘을 까딱 거렸다.
“왜 그래? 벌써 지쳤냐? 그럼 나 이거 누른다?”
“크윽!”
비틀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세우며 다시금 덤벼오는 청년. 하운은 그 모습이 제법 맘에 든다고 생각했다. 공격도 먹히지 않고 상처도 깊건만,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그 모습에 하운은 감탄했다. 정말 그 동화책에 나온 정의의 기사와 판박이군. 마왕의 발톱이 갑옷을 찢어도, 마왕의 마법이 그 살을 태워도 절대로 쓰러지지 않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용사.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오싹할 정도의 전율이 하운의 등골을 꿰뚫었다.
악당이라면 누구나 정의의 용사를 만나고 싶어 한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진정한 악당이라는……선(善)의 적(敵)이라는 이야기니까.
“그러고 보니 네 전에 도시의 수호자 행세를 하던 녀석 말야. 낮도깨비인지 뭔지.”
자신이 인정받고 있다는 고양감 때문일까. 하운은 비틀거리는 청년에게 마지막 일격을 날리는 것도 잊고 자신도 모르게 그런 말을 떠들기 시작했다. 청년의 가쁜 숨소리가 순간적으로 멈추었다.
“그 녀석이 어떻게 죽었는지 아냐? 그게……뒷골목에 거꾸로 매달린 채로 온몸에 나이프가 꽂혀 있었거덩? 으아, 장난 아니었어, 어찌나 많이 박혀있던지 사람이 아니라 선인장 같더라고.”
“…….”
“그래서야 대체 남는 게 뭐냐. 제대로 즐기지도 못하고 자신을 희생하고……결국엔 악당보다도 비참하고 처절한 최후를 맞을 뿐이지. 그건 진짜…….”
“바보 같은 삶 아니냐?”
청년이 움직임이 갑자기 멈추었다. 거칠던 숨소리도 멎었다. 하운은 갑자기 찾아온 그 부자연스러운 정적에 겨우 제정신을 차렸다. 완전히 부서진 도깨비 가면 너머로 감정이 폭발한 청년의 얼굴이 내비쳤다.
하운은 알지 못했다. 그가 장난삼아 꺼낸 남자의 이야기가 청년에게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지. 청년은 그 시간 그 장소에서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 어둠속에서 나타난 밀리언 토치라이트의 사도(使徒)들이 자신의 하나뿐인 형에게 나이프를 꽂는 것을 보고 있었다. 피바다 속에서 절규하며 죽어가던 형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청년은 단 하나뿐인 혈육이 죽어가는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보고 있었다.
청년의 입에서 소리 없는 포효가 터져 나왔다. 그의 눈에서 다시없을 분노가 타올랐다. 하운은 그제야 눈앞이 청년이 가진 ‘흠’을 깨달았다. 99% 정의의 사도인 그를 100%로 만들 수 없는 결정적인 1%를 깨달았다.
“……젠장, 난 이래서 안 된다니까. 꼭 결정적인 순간에 쓸데없는 말을 떠들어 버린다구.”
김빠진 소리를 하며 쓴 웃음을 짓는 하운. 그런 그의 가슴을 노리고 청년의 분노가 날아들었다. 방어를 위해 쳐든 하운의 검을 조각내버리고 그대로 그의 갑옷을 때리는 청년의 주먹. 그 일격으로 하운의 갑옷에 한계가 찾아왔다. 파괴력의 극한을 추구하는 굉천류의 주먹을 이미 수십 번이나 받아낸 갑옷은 더 이상 청년의 정권을 견디지 못하고 산산히 깨져나갔다.
엄청난 충격에 순간적으로 하운의 심장이 멎었다. 커헉, 하고 신음을 토해내며 괴로운 듯 눈을 크게 뜨는 하운. 그 손에서 폭탄의 리모콘이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형의 삶은 가치가 있었어, 바보 같은 삶이 아니었어! 나는……그렇게 믿고 있어!”
호흡이 멈춘 탓에 끔찍한 괴로움을 느끼면서도 하운은 신음하듯 웃었다. 그에게는 울부짖는 청년의 목소리가 마치 어린아이가 투정을 부리는 목소리 같이 들렸다. 동생인 라우가 ‘이번엔 만나는 여자는 진짜로 좋은 여자란 말야’ 하고 말할 때처럼, 다른 사람은 아무도 믿지 않는 일을 혼자서만 고집스럽게 믿고 있는 그런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였다.
“내 이름은 맥스 드라이슈타인! 옳다고 믿는 바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
굉천류의 가르침을 따라 자신의 이름을 토해낸 청년은 그대로 하운의 얼굴을 노려 돌려차기를 먹였다. 하운의 몸이 마치 그대로 팽이처럼 돌며 땅바닥에 머리부터 처박혔다. 부러진 이빨과 피가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청년의 부서진 가면 파편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털썩하는 무거운 소리가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소리를 뚫고 울려 퍼졌다.
“하아……하아…….”
거친 숨을 몰아쉬며 뒤로 물러선 청년 - 맥스는 프로펠러의 기둥에 등을 기댄 채 얼굴에 흐르는 피를 땀과 함께 훔쳐냈다. 기둥에 장치된 폭탄의 타이머가 붉게 깜빡이며 시간을 줄여나가고 있었다.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던 맥스는 순간,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타이머라니……시한폭탄?”
“크……크카카카.”
귀에 거슬리는 웃음소리에 놀라서 시선을 옮긴 맥스는 땅바닥에 쓰러진 채 웃고 있는 하운의 모습을 발견 했다. 웬만한 실력자라도 목이 부러져버렸을 맥스의 일격을 대체 어떻게 버텨낸 것일까. 비틀거리며 일어선 하운은 맥스에게서 물러나며 부러져나간 앞니를 드러내 보였다.
“왜? 내가 스위치를 가지고 있으니까 무선으로 폭발시키는 건줄 알았냐?”
“!”
“크카카! 처음부터 내가 지더라도 폭탄은 터지게 해놨다고. 그게 현명한 악당의 방식이라 이 말씀이야! 아디오스, 맥스 드라이슈타인! 크카카카카!”
신이 난다는 투로 웃으며 멀어져 가는 하운. 타이머의 숫자는 이미 한자리수. 맥스로서는 장치된 폭탄 전부를 해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니, 이젠 폭발에서 몸을 피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5, 4, 3, 2, 1. 무서운 속도로 줄어드는 카운터의 붉은 숫자에 맥스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고 하운은 소리 높여 웃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 얼레?”
얼빠진 소리를 내며 눈을 뜬 맥스는 폭탄의 타이머가 거꾸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은 하운도 마찬가지였다. 어이가 없다는 투로 폭탄을 바라보던 그는 문득 온몸을 저며 내는 것 같은 한기에 황급히 몸을 돌렸다.
째깍.
누군가가 하운의 시선 끝에 서 있었다. 너덜너덜한 후드와 망토로 왜소한 몸을 가리고 어둠에 몸을 맡긴 채 유령처럼 서 있는 정체불명의 인물.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커다란 망토로도 덮이지 않는 거대한 왼팔이었다. 마치 금속의 뼈대에 시계와 톱니바퀴를 억지로 쑤셔 넣어 만든 듯, 기괴하고 흉측한 그 왼팔에 붙어있는 날카로운 다섯 개의 금속 손가락이 꿈틀거리듯 움직였다.
째깍. 째깍.
마치 자신의 종을 부르는 것 같은 그 손가락질에 프로펠러에 붙어있던 폭탄들이 기이한 변화를 일으켰다. 번데기가 허물을 벗는 것처럼 몸에 붙어있는 타이머와 뇌관을 털어내며 기둥에서 떨어져 나온 폭탄들은, 마치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며 바닥을 기어가기 시작했다.
째깍. 째깍. 째깍.
경악한 나머지 아무런 행동도 못하는 둘의 사이를 가로질러간 폭탄들은 거대한 왼손에 닿는 순간 마치 빨려들듯 사라졌다. 째깍거리는 톱니바퀴 소리가 귀 울림처럼 맴돈다. 휘날리는 후드 아래 언뜻 비치는 시계 장치의 눈동자. 눈앞에 존재하는 괴물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이 에스벤베르크에 아무도 없었다. 할머니들이 손자들의 울음을 멈추기 하기 위해 입에 올리는 무시무시한 괴물. 하운도 어린 라우를 겁주기 위해 종종 써먹던 악몽의 이름.
“기, 기계왕(機械王)…….”
맥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꺼낸 이름에 하운은 이를 갈았다. 저주 받을 붉은 홍염을 제외하면 이 세계에서 가장 파괴적인 4명의 존재중 하나. 살아있는 재앙의 화신이자 괴담신(怪談神) 기계왕.
“젠장. 기계왕 나리. 난 누가 날 방해하는 걸 정말 싫어한다고.”
빈정대는 하운의 목소리에 기계왕은 손가락을 조금 꿈틀거렸다. 째깍거리는 발걸음소리를 내며 하운에게로 돌아선 기계왕은 늙은 괘종시계가 12시를 알리는 것 같은 느리고 불규칙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와, 적대, 하겠다, 는 것. 인가.]
“콜록. 컥. 젠장, 그럴 수 있기나 해? 나리는 언터처블(untouchable)이잖아.”
피 섞인 기침을 토해내며 소름이 끼친다는 투로 고개를 내젓는 하운. 째깍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를 바라보던 기계왕은 조용히 돌아가는 풍력발전 프로펠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운은 그 시선이 자신에게서 멀어진 것에 안도하며 입을 열었다.
“어이. 맥스 드라이슈타인.”
“뭐, 뭡니까.”
눈앞에 살아서 나타난 괴담의 모습에 정신을 뺏긴 맥스의 모습에 어이가 없다는 투로 크카카 웃은 하운은 가슴을 쭉 펴고 피투성이 입가를 문질러 닦은 후에 어딘지 모르게 뻐기는 투로 입을 열었다.
“다음에 두고 보자. 크카카.”
오래된 악당처럼 웃고는 비틀거리며 언덕을 내려가는 하운. 맥스는 정신을 차리고 그를 쫓으려 했지만 마치 무언가에 묶인 것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귓가에 울리는 째깍거리는 소리 때문에 마치 가위에 눌린 것처럼 손가락하나 움직이지 않는다. 기계왕은 몸을 움직이려 안간힘을 쓰는 맥스를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수십 개의 자명종이 일제히 울리는 것 같은 새되고 시끄러운 목소리였다.
[분 노 는 훌 륭 한 힘 이 다 맥 스 드 라 이 슈 타 인 하 지 만 네 분 노 는 잘 못 되 어 있 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
[자 신 의 상 처 때 문 에 분 노 해 서 는 자 멸 할 뿐 이 다 옳 다 고 믿 는 것 을 관 철 시 키 고 싶 다 면 타 인 을 위 해 분 노 하 라.]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로 되묻는 맥스는 기계왕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은 형을 죽인 밀리언 토치라이트의 나이프마다 새겨져 있던 문구였다. 분노와 증오로 다시 불타오르는 맥스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기계왕은 나타났을 때처럼 째깍거리는 소리만 남긴 채 어둠속에 녹아들듯 모습을 감추었다.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는 맥스. 그는 안쪽에서부터 타들어 가는 것 같은 가슴을 움켜잡은 채 괴로운 신음을 속으로 삼켰다. 쉴새 없이 돌아가는 프로펠러들 사이에 혼자 남은 상처투성이 정의의 용사를 달래주듯 바람의 정령들이 그 주위를 맴돌았다.
“콜록. 어, 라우냐. 형이 오늘 끝내주는 놈을 만났거들랑? 완전 프로비치 감독영화에나 나올 것 같은 끝장나는 정의의 용사였는데 말야……근데 너 목소리가 왜 그러냐? 뭐, 누구랑 헤어져? 킬? 아앙, 요새 만난다던 그 워홀리커? 앙, 그러게 임마, 내가 처음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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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파광’ 하운 개틀런트]
창살 없는 감옥의 수감자. 통칭 프리즈너 나인의 일원.
훌륭한 스승 밑에서 착실하게 기술을 연마한 훌륭한 정통파 검사지만, 검술을 겨루는 것 보다는 뭔가를 폭발시키는 것을 더 좋아한다. 다만 기계나 화학에 관한 지식이 전무 한 터라 폭탄을 제작하는 능력이 없다는 게 큰 문제. 자기가 만들지 않은 폭탄으로 폭파 테러를 일삼는 그의 모습에 동종업계의 프로들은 자존심도 없는 놈이라고 손가락질하기도 한다.
스케일이 크고 의미 없는 폭력신이 난무하는 마초스러운 영화를 굉장히 좋아한다. 커피는 설탕 없이 못 마시고, 늘 동생 걱정을 하는 면은 평범한 청년 같지만, 사고방식이나 저지르는 짓은 인정사정없는 대 악당. 여자와 어린아이를 제일 먼저 죽이는 나쁜 놈이다.
[기계왕(機械王)]
전쟁 후 나타난 위험도 S급의 네 괴물 중 한명. 별명은 [요람을 흔드는 손] [괴담신] [언터처블(untouchable)]
확실한 능력은 밝혀진 것은 없지만, 세계정부의 위원들을 완벽하게 모방한 꼭두각시 인형을 사용해 세계정부의 전복을 꾀한 전적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강한 11인 중 한명인 가면의 마법사에 의해 그 야망이 분쇄된 후로 잠시 자취를 감추었다가, 최근에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이라 불리는 사건을 일으키며 다시 등장했다.
전자제품에 망령을 깃들게 하여 사용자를 저주에 걸리게 한다거나, 발걸음 소리대신 시계바늘소리가 들린다거나, 엘리베이터가 13층에서 갑자기 멈추면 어느새 등 뒤에 나타난다거나 하는 도시괴담 같은 소문을 몰고 다닐 정도로 정체불명. 누더기 같은 망토와 후드 아래의 맨얼굴을 본 자는 한명도 없다.
악당과 히어로와 괴물
통합국가 에스벤베르크의 수도 하이베르크. 도합 230개의 ‘거리’가 도로와 통로로 묶여 하나의 도시를 이루고 있는 거대한 마천루.
하운 개틀런트는 그 거대한 도시의 가장 외곽지역인 ‘바람의 거리’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다. 바람의 거리는 하이베르크의 전력공급을 담당하는 곳 중 하나로 언덕에 설치된 수많은 풍력발전 프로펠러 때문에 마치 바람개비의 숲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인간을 좋아하는 바람의 정령들이 힘을 보태기 때문에 바람의 거리의 프로펠러들은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그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 하운의 심기를 심하게 거슬렸다.
“그럼 이 몸께서 강제로 멈춰주겠다 이거야.”
풍력발전 프로펠러에 폭탄을 설치하며 투덜투덜 중얼거리는 하운. 그는 어릴 때부터 완벽이나 절대라는 말을 굉장히 싫어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던지 흠이 있어야만 한다. 삐뚤어진 심성인지 아니면 단순한 열등감인지는 그 스스로도 잘 알 수 없었지만, 그에게 완전무결이란 말만큼이나 끔찍한 말은 세상에 없었다.
“환경오염도 없이 전기를 펑펑 만들어 대다니 농담하지 말라고. 그럼 환경보호단체가 시비 걸 거리가 줄어들잖아.”
터무니없는 혼잣말을 하며 폭탄을 단단하게 프로펠러에 고정한 하운은 반걸음 뒤로 물러서서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덕에 존재하는 프로펠러들의 연쇄폭발을 유도하기 위해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꼼꼼히 설치되어 있는 폭탄들. 하운은 그 광경에 씨익 웃고는 주머니에서 폭탄의 폭파용 리모콘을 꺼내들었다.
“좋아, 이제 이걸 누르면 콰광이다!”
“그럼 일단은 그걸 못 누르게 해야 되겠군요.”
높은 곳에서 들려오는 당당한 목소리에 하운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프로펠러 위에 기괴하게 생긴 도깨비얼굴이 떠올라 있었다. 하운은 손에 들고 있던 리모콘을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구름이 걷혀 환하게 비추는 달빛이 프로펠러 위를 비추었다. 그곳에 도깨비 가면을 쓴 체격 좋은 남성이 앉아있는 것을 확인한 하운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도시의 수호자가 납셨구만. 할 일이 그렇게 없나?”
“악행을 저지하는 것 보다 우선시할 일은 없습니다.”
하나뿐인 형제가 준 하얀 머플러를 휘날리며 단호하게 대답하는 도시의 수호자. 하운은 그의 대답에 크카카하는 소리를 내며 즐겁게 웃었다.
“너 진짜 끝내준다. 완전 정의의 사도구만?”
“그런 소리를 들을 정도의 인물은 아닙니다만…….”
청년의 몸이 가볍게 공중을 날았다. 화려하게 공중제비를 돌다가 부드럽게 바닥에 착지하는 그 모습에 휘파람을 불던 하운은 그가 머플러를 휘날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 얼굴에 떠올라 있던 장난기를 지웠다.
“……제가 제 신념을 위해 싸우는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도깨비 가면 너머로 꿋꿋하고 맑은 눈동자가 하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신념이 자리 잡은 눈동자. 하운은 입매를 부자연스럽게 일그러트렸다. 하운은 어렸을 때 동생에게 주기위해 동화책을 훔쳤던 적이 있었다. 그는 청년을 보며 그 동화책에 등장하던 사악한 마왕을 물리친 정의의 기사를 떠올렸다.
“그거 안 됐구만. 100% 정의의 사도가 아니라면 악당을 물리칠 수 없다구.”
하운은 그렇게 비웃듯이 중얼거리며 천천히 윗옷을 벗어던졌다. 차가운 달빛이 마치 스포트라이트처럼 그를 비추었다. 몸에 착 달라붙는 소재로 만들어진 은빛의 갑옷이 하운의 상반신을 감싸고 있었다. 그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긴 장검을 뽑아 몸 앞에 세우고는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왜 이걸 날려버리려는지 아냐?”
굉천류 특유의 주먹을 앞으로 쭉 뻗은 파이팅 포즈를 취한 채 고개를 내젓는 정의의 사도 청년. 하운은 얼굴 앞에 세워 들고 있던 검을 가볍게 회전시키며 옆으로 뿌렸다. 잘 벼려진 검이 공기를 끊는 섬뜩한 소리가 청년의 살갗을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이걸 날리면 하이베르크의 서른 두 개 거리가 암흑에 빠지지, 그중에 하이베르크 중앙병원이 있는데, 그곳엔 생명 유지 장치에 자신의 목숨을 맡긴 수많은 중환자들이 누워있거든? 딱 5분만 그게 멈춰도 저세상으로 가버릴 사람들이.”
빙글빙글. 날카롭게 날이 서있는 장검을 뒷골목 양아치들이 나이프 돌리듯이 회전시키며 천천히 옆으로 움직이는 하운. 청년은 그의 검과 발걸음을 눈으로 쫓으며 계속 그와 일직선상에 자신의 몸을 위치시켰다. 하운은 싸움에 익숙한 그의 모습에 히죽 웃으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걸 알면서도 이걸 부수겠다는 겁니까.”
“앙. 그 사람들이 다 죽든 말든 아무 상관없어. 난 그저 이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는 프로펠러가 맘에 안 들 뿐이거든. 크카카.”
귀에 거슬리는 소리로 웃으며 검을 늘어트린 하운은 흘러내린 와인색의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게 악당이야. 정의의 사도 양반. 타인을 신경 쓰지 않고 지 좋을 대로만 하는 인간.”
“……이!”
도깨비 가면 너머에서 분노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운은 그 목소리를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를 박차고 청년에게 달려들었다. 하운이 양손으로 쥐고 있는 검이 상당히 기괴한 각도를 그리며 청년의 목을 노렸다. 간발의 차로 검을 피하고 있는 힘껏 주먹을 내뻗는 청년. 하운은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귓가를 스쳐가는 그 주먹에 소름이 끼친다는 얼굴을 한 채 쉬지 않고 맹공을 퍼부었다.
“그리고 그걸 방해받으면 기분이 엄청 나쁘다고! 성격이 더럽거든!”
청년은 대답대신 무시무시한 눈동자로 하운의 가슴에 발차기를 먹였다. 온힘을 다해 차면 바위를 쪼개는 청년의 발차기에 하운의 몸은 그대로 뒤로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하지만 그도 잠시 하운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투로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내저었다.
“어우. 젠장. 무지막지한데. 갑옷이 아니면 죽었겠어.”
갑옷의 가슴부분에 선명하게 찍힌 청년의 발자국을 질렸다는 투로 바라보던 하운은 갑옷을 가볍게 툭툭 두드리며 뻐기듯이 중얼거렸다.
“이건 원래 세계정부군 놈들 물건인데 내가 운 좋게 손에 넣었지. 듣기로는 덤프트럭이 전속력으로 들이받아도 멀쩡하다고 하더라고.”
움푹 들어가 있던 발자국이 어느새 자취를 감추어 갑옷은 처음의 깨끗한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하운은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반대 손으로 고쳐 쥐고 주머니에서 리모컨을 꺼내들었다. 가까스로 평정심을 되찾은 청년의 눈이 다시 한 번 거칠게 요동친다. 하운은 그 눈동자가 마음에 든다는 투로 웃으며, 들고 있는 장검을 까닥여보였다.
“덤벼, 정의의 사도. 싸우지 않으면 악당이 이긴다.”
청년은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하운에게로 돌진했다.
프로펠러를 돌리던 바람의 정령들이 싸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몇 명은 청년의 머플러를, 몇 명은 하운의 긴 머리칼을 휘날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뿐. 하운이 내지르는 바람까지 찢을 것 같은 날카로운 검과 청년이 내지르는 대기를 잡아 찢는 파괴적인 주먹에 바람의 정령들은 넌더리를 내며 둘에게서 멀어져갔다.
휘두르는 주먹과 발차기가 갑옷을 두드린다. 매서운 칼날이 청년의 몸에 상처를 늘려간다. 언뜻 보면 단순한 소모전. 하지만 싸움은 분명 상처를 고스란히 입고 있는 청년에게 더 불리했다. 흐르는 피 때문에 점점 몸이 무겁고 하운이 손에 들고 있는 폭탄의 스위치에 신경이 쓰여 청년의 동작은 시간이 지날수록 파괴력을 잃어갔다.
하운은 이제는 궤적을 눈으로 쫓을 수 있을 정도로 느려진 청년의 주먹을 피해 뒤로 슬쩍 물러났다. 검을 늘어트리고 거리를 벌린 채 비웃듯이 중얼거리는 하운.
“이것 참, 도시의 수호자도 별거 아니네. 룩셈부르크 황제 짝퉁을 아작냈다고 해서 상당히 기대했는데.”
불규칙한 호흡을 고르기 위해 거칠게 들썩이는 청년의 어깨가 굳었다. 하운은 그의 그런 동요를 놓치지 않았다. 금이 가 부서지기 시작한 도깨비 가면 너머로 드러난 앳되어 보이는 얼굴. 자신의 동생 또래쯤 되어 보이는 그 지친 얼굴을 바라보며 하운은 크카카하고 웃으며 손에 들고 있는 리모콘을 까딱 거렸다.
“왜 그래? 벌써 지쳤냐? 그럼 나 이거 누른다?”
“크윽!”
비틀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세우며 다시금 덤벼오는 청년. 하운은 그 모습이 제법 맘에 든다고 생각했다. 공격도 먹히지 않고 상처도 깊건만,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그 모습에 하운은 감탄했다. 정말 그 동화책에 나온 정의의 기사와 판박이군. 마왕의 발톱이 갑옷을 찢어도, 마왕의 마법이 그 살을 태워도 절대로 쓰러지지 않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용사.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오싹할 정도의 전율이 하운의 등골을 꿰뚫었다.
악당이라면 누구나 정의의 용사를 만나고 싶어 한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진정한 악당이라는……선(善)의 적(敵)이라는 이야기니까.
“그러고 보니 네 전에 도시의 수호자 행세를 하던 녀석 말야. 낮도깨비인지 뭔지.”
자신이 인정받고 있다는 고양감 때문일까. 하운은 비틀거리는 청년에게 마지막 일격을 날리는 것도 잊고 자신도 모르게 그런 말을 떠들기 시작했다. 청년의 가쁜 숨소리가 순간적으로 멈추었다.
“그 녀석이 어떻게 죽었는지 아냐? 그게……뒷골목에 거꾸로 매달린 채로 온몸에 나이프가 꽂혀 있었거덩? 으아, 장난 아니었어, 어찌나 많이 박혀있던지 사람이 아니라 선인장 같더라고.”
“…….”
“그래서야 대체 남는 게 뭐냐. 제대로 즐기지도 못하고 자신을 희생하고……결국엔 악당보다도 비참하고 처절한 최후를 맞을 뿐이지. 그건 진짜…….”
“바보 같은 삶 아니냐?”
청년이 움직임이 갑자기 멈추었다. 거칠던 숨소리도 멎었다. 하운은 갑자기 찾아온 그 부자연스러운 정적에 겨우 제정신을 차렸다. 완전히 부서진 도깨비 가면 너머로 감정이 폭발한 청년의 얼굴이 내비쳤다.
하운은 알지 못했다. 그가 장난삼아 꺼낸 남자의 이야기가 청년에게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지. 청년은 그 시간 그 장소에서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 어둠속에서 나타난 밀리언 토치라이트의 사도(使徒)들이 자신의 하나뿐인 형에게 나이프를 꽂는 것을 보고 있었다. 피바다 속에서 절규하며 죽어가던 형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청년은 단 하나뿐인 혈육이 죽어가는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보고 있었다.
청년의 입에서 소리 없는 포효가 터져 나왔다. 그의 눈에서 다시없을 분노가 타올랐다. 하운은 그제야 눈앞이 청년이 가진 ‘흠’을 깨달았다. 99% 정의의 사도인 그를 100%로 만들 수 없는 결정적인 1%를 깨달았다.
“……젠장, 난 이래서 안 된다니까. 꼭 결정적인 순간에 쓸데없는 말을 떠들어 버린다구.”
김빠진 소리를 하며 쓴 웃음을 짓는 하운. 그런 그의 가슴을 노리고 청년의 분노가 날아들었다. 방어를 위해 쳐든 하운의 검을 조각내버리고 그대로 그의 갑옷을 때리는 청년의 주먹. 그 일격으로 하운의 갑옷에 한계가 찾아왔다. 파괴력의 극한을 추구하는 굉천류의 주먹을 이미 수십 번이나 받아낸 갑옷은 더 이상 청년의 정권을 견디지 못하고 산산히 깨져나갔다.
엄청난 충격에 순간적으로 하운의 심장이 멎었다. 커헉, 하고 신음을 토해내며 괴로운 듯 눈을 크게 뜨는 하운. 그 손에서 폭탄의 리모콘이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형의 삶은 가치가 있었어, 바보 같은 삶이 아니었어! 나는……그렇게 믿고 있어!”
호흡이 멈춘 탓에 끔찍한 괴로움을 느끼면서도 하운은 신음하듯 웃었다. 그에게는 울부짖는 청년의 목소리가 마치 어린아이가 투정을 부리는 목소리 같이 들렸다. 동생인 라우가 ‘이번엔 만나는 여자는 진짜로 좋은 여자란 말야’ 하고 말할 때처럼, 다른 사람은 아무도 믿지 않는 일을 혼자서만 고집스럽게 믿고 있는 그런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였다.
“내 이름은 맥스 드라이슈타인! 옳다고 믿는 바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
굉천류의 가르침을 따라 자신의 이름을 토해낸 청년은 그대로 하운의 얼굴을 노려 돌려차기를 먹였다. 하운의 몸이 마치 그대로 팽이처럼 돌며 땅바닥에 머리부터 처박혔다. 부러진 이빨과 피가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청년의 부서진 가면 파편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털썩하는 무거운 소리가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소리를 뚫고 울려 퍼졌다.
“하아……하아…….”
거친 숨을 몰아쉬며 뒤로 물러선 청년 - 맥스는 프로펠러의 기둥에 등을 기댄 채 얼굴에 흐르는 피를 땀과 함께 훔쳐냈다. 기둥에 장치된 폭탄의 타이머가 붉게 깜빡이며 시간을 줄여나가고 있었다.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던 맥스는 순간,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타이머라니……시한폭탄?”
“크……크카카카.”
귀에 거슬리는 웃음소리에 놀라서 시선을 옮긴 맥스는 땅바닥에 쓰러진 채 웃고 있는 하운의 모습을 발견 했다. 웬만한 실력자라도 목이 부러져버렸을 맥스의 일격을 대체 어떻게 버텨낸 것일까. 비틀거리며 일어선 하운은 맥스에게서 물러나며 부러져나간 앞니를 드러내 보였다.
“왜? 내가 스위치를 가지고 있으니까 무선으로 폭발시키는 건줄 알았냐?”
“!”
“크카카! 처음부터 내가 지더라도 폭탄은 터지게 해놨다고. 그게 현명한 악당의 방식이라 이 말씀이야! 아디오스, 맥스 드라이슈타인! 크카카카카!”
신이 난다는 투로 웃으며 멀어져 가는 하운. 타이머의 숫자는 이미 한자리수. 맥스로서는 장치된 폭탄 전부를 해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니, 이젠 폭발에서 몸을 피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5, 4, 3, 2, 1. 무서운 속도로 줄어드는 카운터의 붉은 숫자에 맥스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고 하운은 소리 높여 웃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 얼레?”
얼빠진 소리를 내며 눈을 뜬 맥스는 폭탄의 타이머가 거꾸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은 하운도 마찬가지였다. 어이가 없다는 투로 폭탄을 바라보던 그는 문득 온몸을 저며 내는 것 같은 한기에 황급히 몸을 돌렸다.
째깍.
누군가가 하운의 시선 끝에 서 있었다. 너덜너덜한 후드와 망토로 왜소한 몸을 가리고 어둠에 몸을 맡긴 채 유령처럼 서 있는 정체불명의 인물.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커다란 망토로도 덮이지 않는 거대한 왼팔이었다. 마치 금속의 뼈대에 시계와 톱니바퀴를 억지로 쑤셔 넣어 만든 듯, 기괴하고 흉측한 그 왼팔에 붙어있는 날카로운 다섯 개의 금속 손가락이 꿈틀거리듯 움직였다.
째깍. 째깍.
마치 자신의 종을 부르는 것 같은 그 손가락질에 프로펠러에 붙어있던 폭탄들이 기이한 변화를 일으켰다. 번데기가 허물을 벗는 것처럼 몸에 붙어있는 타이머와 뇌관을 털어내며 기둥에서 떨어져 나온 폭탄들은, 마치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며 바닥을 기어가기 시작했다.
째깍. 째깍. 째깍.
경악한 나머지 아무런 행동도 못하는 둘의 사이를 가로질러간 폭탄들은 거대한 왼손에 닿는 순간 마치 빨려들듯 사라졌다. 째깍거리는 톱니바퀴 소리가 귀 울림처럼 맴돈다. 휘날리는 후드 아래 언뜻 비치는 시계 장치의 눈동자. 눈앞에 존재하는 괴물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이 에스벤베르크에 아무도 없었다. 할머니들이 손자들의 울음을 멈추기 하기 위해 입에 올리는 무시무시한 괴물. 하운도 어린 라우를 겁주기 위해 종종 써먹던 악몽의 이름.
“기, 기계왕(機械王)…….”
맥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꺼낸 이름에 하운은 이를 갈았다. 저주 받을 붉은 홍염을 제외하면 이 세계에서 가장 파괴적인 4명의 존재중 하나. 살아있는 재앙의 화신이자 괴담신(怪談神) 기계왕.
“젠장. 기계왕 나리. 난 누가 날 방해하는 걸 정말 싫어한다고.”
빈정대는 하운의 목소리에 기계왕은 손가락을 조금 꿈틀거렸다. 째깍거리는 발걸음소리를 내며 하운에게로 돌아선 기계왕은 늙은 괘종시계가 12시를 알리는 것 같은 느리고 불규칙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와, 적대, 하겠다, 는 것. 인가.]
“콜록. 컥. 젠장, 그럴 수 있기나 해? 나리는 언터처블(untouchable)이잖아.”
피 섞인 기침을 토해내며 소름이 끼친다는 투로 고개를 내젓는 하운. 째깍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를 바라보던 기계왕은 조용히 돌아가는 풍력발전 프로펠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운은 그 시선이 자신에게서 멀어진 것에 안도하며 입을 열었다.
“어이. 맥스 드라이슈타인.”
“뭐, 뭡니까.”
눈앞에 살아서 나타난 괴담의 모습에 정신을 뺏긴 맥스의 모습에 어이가 없다는 투로 크카카 웃은 하운은 가슴을 쭉 펴고 피투성이 입가를 문질러 닦은 후에 어딘지 모르게 뻐기는 투로 입을 열었다.
“다음에 두고 보자. 크카카.”
오래된 악당처럼 웃고는 비틀거리며 언덕을 내려가는 하운. 맥스는 정신을 차리고 그를 쫓으려 했지만 마치 무언가에 묶인 것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귓가에 울리는 째깍거리는 소리 때문에 마치 가위에 눌린 것처럼 손가락하나 움직이지 않는다. 기계왕은 몸을 움직이려 안간힘을 쓰는 맥스를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수십 개의 자명종이 일제히 울리는 것 같은 새되고 시끄러운 목소리였다.
[분 노 는 훌 륭 한 힘 이 다 맥 스 드 라 이 슈 타 인 하 지 만 네 분 노 는 잘 못 되 어 있 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
[자 신 의 상 처 때 문 에 분 노 해 서 는 자 멸 할 뿐 이 다 옳 다 고 믿 는 것 을 관 철 시 키 고 싶 다 면 타 인 을 위 해 분 노 하 라.]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로 되묻는 맥스는 기계왕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은 형을 죽인 밀리언 토치라이트의 나이프마다 새겨져 있던 문구였다. 분노와 증오로 다시 불타오르는 맥스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기계왕은 나타났을 때처럼 째깍거리는 소리만 남긴 채 어둠속에 녹아들듯 모습을 감추었다.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는 맥스. 그는 안쪽에서부터 타들어 가는 것 같은 가슴을 움켜잡은 채 괴로운 신음을 속으로 삼켰다. 쉴새 없이 돌아가는 프로펠러들 사이에 혼자 남은 상처투성이 정의의 용사를 달래주듯 바람의 정령들이 그 주위를 맴돌았다.
“콜록. 어, 라우냐. 형이 오늘 끝내주는 놈을 만났거들랑? 완전 프로비치 감독영화에나 나올 것 같은 끝장나는 정의의 용사였는데 말야……근데 너 목소리가 왜 그러냐? 뭐, 누구랑 헤어져? 킬? 아앙, 요새 만난다던 그 워홀리커? 앙, 그러게 임마, 내가 처음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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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파광’ 하운 개틀런트]
창살 없는 감옥의 수감자. 통칭 프리즈너 나인의 일원.
훌륭한 스승 밑에서 착실하게 기술을 연마한 훌륭한 정통파 검사지만, 검술을 겨루는 것 보다는 뭔가를 폭발시키는 것을 더 좋아한다. 다만 기계나 화학에 관한 지식이 전무 한 터라 폭탄을 제작하는 능력이 없다는 게 큰 문제. 자기가 만들지 않은 폭탄으로 폭파 테러를 일삼는 그의 모습에 동종업계의 프로들은 자존심도 없는 놈이라고 손가락질하기도 한다.
스케일이 크고 의미 없는 폭력신이 난무하는 마초스러운 영화를 굉장히 좋아한다. 커피는 설탕 없이 못 마시고, 늘 동생 걱정을 하는 면은 평범한 청년 같지만, 사고방식이나 저지르는 짓은 인정사정없는 대 악당. 여자와 어린아이를 제일 먼저 죽이는 나쁜 놈이다.
[기계왕(機械王)]
전쟁 후 나타난 위험도 S급의 네 괴물 중 한명. 별명은 [요람을 흔드는 손] [괴담신] [언터처블(untouchable)]
확실한 능력은 밝혀진 것은 없지만, 세계정부의 위원들을 완벽하게 모방한 꼭두각시 인형을 사용해 세계정부의 전복을 꾀한 전적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강한 11인 중 한명인 가면의 마법사에 의해 그 야망이 분쇄된 후로 잠시 자취를 감추었다가, 최근에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이라 불리는 사건을 일으키며 다시 등장했다.
전자제품에 망령을 깃들게 하여 사용자를 저주에 걸리게 한다거나, 발걸음 소리대신 시계바늘소리가 들린다거나, 엘리베이터가 13층에서 갑자기 멈추면 어느새 등 뒤에 나타난다거나 하는 도시괴담 같은 소문을 몰고 다닐 정도로 정체불명. 누더기 같은 망토와 후드 아래의 맨얼굴을 본 자는 한명도 없다.
# by | 2007/03/21 16:58 | 에스벤베르크 - 기타 | 트랙백(1) | 핑백(1) | 덧글(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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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에스벤베르크 [untouchable]-팬 아트
에스벤베르크 AS - 악당과 히어로와 괴물에스벤베르크를 애독하는 독자입니다..설정부터 반한 기계왕[요람을 흔드는 손] [괴담신] [언터처블(untouchable)]의 팬아트를 한번 그려 보았습니다.부족한 점이 많습니다만, 후에 좀더 노력해서 좀더 멋지게 그릴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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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까 너무 부드러운 표현일까요 이건!
기계왕님이 멋져요 하아하아
기계왕은 좀비 혹은 퍼핏 마스터인걸까요!!!
hypnoss님//기계왕은 말 그대로 괴물입니다.
루아//매, 매니악한 취향이다.
比良坂初音님//악당이라 어쩔수 없습니다.
스펙터님//우왓. 들켰다.
물빛바람님//감사합니다. 재미있으셨다니 저도 기쁘군요.
제이형님//모티브를 따왔습니다.
늬소님//사실 요즘 포스팅은 이글루 이름에 충실하지 못하긴 하지만...기계왕은 후자에 더 가까운것 같지만 실은 단독 카테고리를 가진 독자적인 괴물입니다.
위노님//지. 진해마경도 해봐야하는데...
다만, 확실히 기계왕의 한마디는 마음에 와닿는구만요 역시나..
느와르님은 사람의 심장에 콕콕 박히는 한 문장에 탁월하셔요.
R의 향연님//저도 매우 싫어합니다.
그레이브님//브라보.
메바님//하지만 정의를 지키는 쪽도 상당히 많습니다. 다행이죠.
LOKI님//기계왕 괴담은 에스벤베르크에서는 당히 오래된 괴담이지만 기계왕 본인이 수면으로 떠오른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기계왕이 전쟁이 끝난후 본격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밝히고 세계정부를 적대하기 시작한 것이죠. 그녀가 괴담신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것 때문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에스벤베르크의 중립자'였던 기계왕이 '세계정부의 적'이 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겨울나그네님//진짜 마왕은 [언브레이커블unbreakable]인 '파괴왕' 쪽입니다. 기계왕은 오히려 선량하죠.